
PARALLEL DIMENSION REF. r-99999
OASIS
눈을 감으면,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선가 그를 부른다.
그러므로 그는 가야만 했다.
Oasis
PINK RAVI
막 지난 모래폭풍은 전에 없이 독했다. 하지만 버석한 것 밖에 남은 것이 없는 사막 위는 언제 바람이라도 불었냐는 듯 늘 바싹 마른 금빛이다. 산 것이든 원래 죽은 것이든 모래처럼 바스러져가는 대지 위는 죽음만 태양처럼 으시대고 있다.
바스스슥.
손바닥만한 바위전갈 한 마리가 모래로 덮인 바위 틈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삐죽한 꼬리를 까닥이며 그것이 바위그늘을 타고 잰 걸음을 칠 때, 그것 옆의 모래산 같았던 것이 움쑥 들썩였다. 기척에 소스라친 전갈이 날래게 꽁무니를 빼려 할 때였다.
터헙!
모랫더미에서 튀어나온 손 하나가 그것을 잡아챘다. 손아귀 안에서 전갈이 독침을 뻐세우고 바르작댔으나 생명줄이라도 잡은 듯 거센 악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둥그러니 솟아있던 모래둔덕이 조금씩 으스러지며 드러난 것은 거뭇한 남자의 신형이었다.
"큭, 커헉! 컥!"
의식을 찾자마자 느낀 것은 기도를 꽉 틀어 막은 모래였다. 갑자기 몰아친 폭풍에 미처 대비할 새 없이 떠밀렸다. 얼마나 깊이 파묻혀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상황, 그는 몸을 짓누르는 모래 아래에서 사력을 다해 바르작댔다.
그렇게 겨우 얼굴을 빼내고서야 좀 숨통이 트여 라비는 버석거리는 눈을 열심히 껌벅였다. 이글대는 햇빛이 모래보다 따갑게 눈알을 긁어댔다.
어깨부터 기계의수인 왼팔은 모래에 잔뜩 절어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 돌덩이 같은 팔로 체중을 겨우 지탱해 비척대며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그는 조금 전 반사적으로 움켜잡았던 게 전갈이라는 걸 깨달았다.
조그만 것이 운도 없었다. 마지막 생명줄이라고 발악한 것이 쇳덩이 위였을 줄 저도 몰랐겠지. 기계손 위에 씌워둔 가죽장갑도 뚫고 독침을 야무지게 박아넣은 벌레를 내려다보다가 라비는 그것을 한 입에 털어넣었다.
까드득, 까득, 질긴 껍질을 씹으며 그는 삐걱이는 팔로 제가 누워 있던 모랫더미 주변을 파헤쳤다. 운이 좋으면 소지품 두어개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숨이 붙어있는 것만도 행운이긴 했지만, 지나버린 행운을 곱씹으며 행복을 짜내는 건 절박하지 않은 자들의 특권이다.
언젠가부터 그는 걸탐스레 다음의 행운만을 바랐다. 희망이 사치가 되어버리니 그것밖엔 욕심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때는. 그 한 마디와 함께 토기처럼 치밀어오르는 상념에 그가 바싹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한때는, 그도 그런 거창한 걸 가지고 있었을 때가 있었다. 모래폭풍 전, 아니 그보다도 전. 마지막으로 비가 오던 날.
그 때 손 끝에 투박한 것이 걸렸다. 두 손으로 쥐어잡고 끄집어 내자 모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은 가죽자켓이다. 닳아 헤졌어도 여전히 가솔린만큼 검은 것이 표피를 드러냈을 때, 비명처럼 환청이 날아들었다.
-가!
순간 무릎이 휘청였다. 반쯤 나오다 만 자켓이 순간 시체의 피투성이 팔과 겹쳐 보인다. 그가 소스라쳐 그것을 모랫바닥에 내팽개쳤다. 머릿속에서 이명과 환청이 쨍강쨍강 난동을 피운다.
-살아서 가야할 것 아냐! 가라고!
-그렇게 니 뜻대로 다 해먹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같은 목소리가 그를 독촉하고 그를 원망한다. 두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그는 꺼억꺼억 목졸린 신음만 토했다. 숨이 막혔다. 식은땀이 후두둑 모래 위로 점을 그린다.
-여기까지 왔잖아! 어서 가!
그게 마지막이었다. 마지막 남은 동료의 마지막 말. 자이언트샌드웜의 거대한 집게발이 그 위로 덮쳐오고 있었다.
그는 그 때, 죽어가는 동료를 버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바이크를 타고 내달렸다. 뒤는 돌아보지 못했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의 낮과 밤을 지나는지 어디로 가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도망칠 때에 모래폭풍을 만나 휩쓸렸다.
동료의 생명을 앗아간 괴물은 그의 원수이자 현대인류의 숙적이었다. 성인남성정도의 길이까지 자라는 것은 샌드웜, 모래산을 통째로 감을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큰 개체를 자이언트샌드웜이라고 한다.
오염은 지구를 바싹 말렸고 인간의 업보는 고스란히 일그러진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숲은 사라지고 돌무더기와 모래만 남은 곳에는 괴물들이 알을 까고 둥지를 틀었다.
자이언트샌드웜의 몸은 콘크리트와 철근과 건물의 잔해로 얽혀 끝이 안보이게 길었고, 길다란 몸통에 달린 수백개의 다리에는 갈고리가 무수히 달려 끝에 닿는 것은 모조리 찢어발겼다. 대가리에는 눈 대신 이빨이 빼곡히 달린 촉수같은 주둥이와 유난히 긴 두 집게발이 있었다. 집게발에서는 웜베놈이라 불리는 꺼먼 맹독을 뿜었는데, 이게 응축된 가솔린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낸 이후 인간들은 이것마저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것들은 물에 취약해 오아시스 근처로는 오지 못한다는 점이었지만, 이번에도 인간의 욕심이 모든 걸 망쳤다. 엔진과 모터를 돌리겠다며 인간들이 가져온 모래괴물의 맹독은 닿는 모든 것을 빠르게 오염시켰고 얼마 남지 않았던 오아시스들조차 결국 제 손으로 망가트렸다. 물은 채 마르기도 전 오염되어 썩었다.
라비의 고향은 그 중 가장 최초의 오염지대였다. 고향을 잃은 후 그는 매번 새로운 오아시스를 찾아 헤맸으나, 모든 곳이 똑같은 결말이었다. 생존에 샌드웜보다 더 큰 재앙은 인간이었다.
주위를 파헤친지 얼마 되지 않아, 다행히도 멀리 떨어지지 않은 모랫더미속에 바이크와 거기 매달려있던 배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라비는 허겁지겁 배낭부터 헤쳐 수통 먼저 열고 입을 축였다. 한 방울도 놓칠 수가 없어 한 모금 한 모금이 조심스러웠다. 그마저도 겨우 갈증이 가실만큼만 마시고 입을 떼야 했다. 어디로 휩쓸려온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살아있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찾아낸 자켓에서 모래를 털어내고 꿰어입은 그가 바이크에 시동을 건다. 푸륵 푸륵 사레들린듯 기침하던 엔진에 한참만에 시동이 걸린다.
얼굴 반을 가려 묶은 검은 두건 위에는 콧날을 가로질러 언제 생긴지 모르는 생채기가 벌겋게 긁혀있었다. 정면으로 모랫바람을 맞아 더 쓰라린 얼굴을 찡그리며 그가 엑셀에 발을 올렸다. 샌드체인을 얽은 휠이 모래 위를 박찬다.
+
최후의 오아시스가 마르던 날은 몇 년만의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들뜬 사람들이 하늘을 보며 떨어지는 물방울을 음미할 때, 라비도 그 곳에 있었다.
동료들은 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거쳐온 오아시스의 수만큼 있었던 동료들은 그것이 하나 마를 때마다 함께 그의 곁을 떠났다. 최후의 오아시스에 함께 있었던 마지막 남은 동료는 라비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했으며 가장 많이 부딪힌 자였다.
-비 온 다음에 붉은 사구에 나가 본 적 있냐.
시원하게 내리쏟는 빗속에서 그가 말했다. 드물게 그는 기분이 좋아보였었다.
-비가 지나가고 첫번째 해가 뜨기 시작할 때 붉은 사구 가장 높은 언덕 위로 올라가면, 신의 정원이 보여.
신의 정원. 허황되기 그지없는 단어를 입안으로 굴려 곱씹으며 그가 덧붙였다.
-나는 그걸 본 후로 기적을 믿지 않아.
그 말의 의미를 묻기도 전에 자이언트샌드웜과 샌드웜 무리가 오아시스를 덮쳤다. 괴물은 물이라면 질색을 하니 비오는 날에 습격이 있을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저항이 무의미할 정도로 압도적인 숫자였다.
그 참상 가운데서 라비는 그때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저 괴물은 제 독의 냄새를 맡는 걸지도 모른다는 걸. 인간들이 그걸 탐내 가져오는 이상 인간은 저것을 피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자이언트샌드웜의 등판 껍질을 대어다 개조한 군용트럭이 벌레의 몸통에 끼어 허공에서 산산조각났다. 어설프게 지어올렸던 돌집들은 꼬리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으스러졌다. 먼지조차 일지 않는 빗속에서 사람들이 먹히고 있었다.
아수라장 가운데 라비는 바이크에서 검처럼 길고 날선 것을 빼내 들었다. 괴물의 집게발을 떼어다가 연마한 칼이었다. 보통 사람 손으로 집으면 벌레독으로 피부가 거멓게 중독되는 것을 라비는 기계팔로 들고 놈들을 썰고 다녔다. 검은 칼, 저보다 그것의 이름으로 사람들은 자신을 부르곤 했다.
가슴팍 주머니에서 캡슐 하나를 꺼내 이빨 사이에서 짓이기며 라비는 크게 도약했다. 후끈하게 식도를 타고 넘어가 몸으로 퍼지는 전갈독이 말초신경을 곤두세우며 그를 각성시킨다.
쌔액!
무게가 없는듯 휘둘러지는 검날의 궤적대로 샌드웜 몇마리가 통으로 썰려 후두둑 흩어진다. 그러나 이 괴물들은 몸통을 한번 동강낸다고 죽지 않는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때 까지 몇 번을 짓이기고 또 짓이겨야 한다.
라비는 아비규환 가운데 반쯤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칼질 한번에 썰려나가는 것이 사람들의 비명인지 괴물의 발악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는 사냥꾼이었지 구원자는 아니었다. 지키면서 하는 싸움은 알지도 못했고 하기도 싫었다. 지키지 못할 걸 지키겠답시고 발악했던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 날로 족했다. 그래서 이 전투가 전혀 달갑지 않았다.
끄어어어어.
라비의 검은 칼에 집게발 한쪽을 잃은 자이언트샌드웜이 몸을 비틀어댄다. 그것의 몸통 가득 박힌 폐기물들이 입 없는 그것 대신 폐건물처럼 울었다.
괴로운듯 바르작대는 그것을 보며 라비가 고개를 들어 동료를 찾았다. 그는 어느새 제 바이크에 올라타 있었다. 퍼런 스파크를 튀기는 사슬을 팔에 감은채 빙빙 돌리던 몰이꾼, 레오가 이윽고 온 체중을 실어 그것을 날린다.
사슬 말단에 빼곡히 박아넣은 괴물의 이빨이 흡착판처럼 자이언트샌드웜의 집게발에 달라붙어 휘감긴다. 익숙하게 그걸 타고 있는 바이크에 연결한채 그가 엑셀을 밟았다. 츠즈즈즉, 물먹은 모래가 바퀴아래서 뭉그러지고 사슬이 팽팽히 당겨지는 걸 신호로 라비가 다시 날아올랐다.
터엉.
공기를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커다란 몸통 가운데가 점토처럼 으스러진다. 쇄도하는 칼날의 궤적에 휘말린 빗방울이 허공에서 비산했다. 힘에 형태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나선형으로 흩어지는 빗방울들에 순간 시선을 빼앗긴 레오의 위로 그 때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알아 챈 순간은 이미 늦은 후였다.
-아악!!!!
낙하한 샌드웜의 파편은 소리죽여 모래 위의 사람 하나를 짓이겼다. 돌 아래 깔린 사람에게서 터진 비명소리가 악몽처럼 울렸다. 손가락을 눌러 개미 하나를 죽이듯, 그런 장난스런 압력처럼 동료가 바위 아래에 깔렸다. 겨우 양 팔과 얼굴만 바위 밖으로 보였으나 그 아래는 가망 없는 직격이었다.
자이언트샌드웜의 대가리에 칼을 박아넣으려다 말고 곧장 그를 향해 달려오려는 라비에게 레오가 악을 썼다. 언제 토했는지 모를 선혈로 입가를 적시고서.
-가!
-살아서 가야할 것 아냐! 가라고!
-여기까지 왔잖아! 어서 가!
소리지르는 그의 뒤로, 산맥처럼 커다란 자이언트샌드웜의 무리가 지평선을 가득 메꾸며 다가오고 있었다.
+
라비는 비를 끔찍히 싫어했다. 비가 내리면 그는 꼼짝도 못하고 자리에 못박혀 저 먼 지평선만 내다보곤 했다. 비에 젖은 모래 위, 벌레처럼 움츠려 죽음만 기다리던 그날의 제 피냄새가 어디선가 물씬거리는 것 같았다. 그게 그를 죽고 싶게 했다.
지구는 참고 참아 썩어 문드러지기 직전의 오열처럼 비를 내리곤 했으므로, 불행히도 그에게는 제 상처에 익숙해질 기회가 많지 않았다. 상실도 마찬가지였다.
비오는 날 꼭 무언가를 잃는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여겼는데 자꾸만 잃는 것이 생긴다.
그 날도 비가 왔었다. 고향도 어머니도 팔도 잃은 날.
하지만 지금, 언제 비가 내렸냐는듯 사막은 바싹 말라 타오른다. 벌레독에 거멓게 썩었던 그의 고향도 모래괴물에게 먹힌 마지막의 오아시스도, 그와 함께 잃은 사람들도 모두 없었던 일마냥 거세게.
모래를 헤치며 나아가는 바이크 위, 라비가 계기판을 일별했다. 바이크에 연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근처에 얼씬거리는 사냥꾼들에게 약탈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대로 말라죽겠지. 라비는 덤덤하게 자신의 미래를 예상했다.
한 때는 삶이 간절했을 때가 있었다. 살아야한다고, 이유도 모른채 짊어져버린 목적의식을 이유삼곤 제자리를 맴도는 의문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주위는 돌아보지 않았다. 저 혼자 살아 남는 것만이 목적이었으므로. 압도적인 실력의 그에게 구원을 바라던 사람들, 그들의 눈에 떠오른 선망을 비웃으며 더 보란듯 잔독하게 살아남으며 연명해왔다.
왜냐하면 그는 가야했으니까. 어머니의 할머니의 고조할머니의, 까마득한 구전으로 내려온 어머니의 핏줄만이 아는 그 곳으로.
-살아남거라.
고향의 마지막날, 마을 최고의 전사였던 어머니가 어린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새겨두었다. 그녀가 목에 걸어준 일족의 상징이 쇳덩이처럼 몸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 목숨 짊어질 생각 말고, 너 목숨만 끌어안고 살아. 살아남아서 살아가거라. 그리고 그 곳을 꼭 찾아가야 한다.
소년의 가슴에 새겨진 말은 곧 어머니의 묘비명이 되었다. 어머니가 그에게 바랐던 단 하나, 그 유지를 따라 악착같이 살아남느라 상실을 추스리지 못해 마음은 텅 빈 채 겉껍질만 단단해진 채로, 그렇게 살아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또 다시 모든 것을 잃었다.
무엇을 향해 가야하는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구원 받은들 무엇을 위해 기뻐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가야했다. 이미 삶이 관성처럼 그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무거워 쥐기 싫었던 목숨들이 도리어 죽은 다음에 다시 돌아와 그를 짓누르며, 가라고 말했으므로.
그는 가야만 했다.
+
사막의 밤은 냉엄하다. 순식간에 떨어진 기온은 하룻밤 새 사람을 얼려죽인다. 낮 내내 달리느라 흥분이 가시지 않은 엔진의 열기에 몸을 녹이며 라비는 바위벽 아래로 조그맣게 불을 피웠다. 파측, 파측, 부싯돌 끝에서 핀 연기는 바싹 마른 샌드웜의 잔해 위에서 쉽게 불씨로 변한다.
사사사사.
모랫바람이 기암괴석의 몸통을 타고 훑으며 요사하게 나불댄다. 사막 중간 중간 있는 바위협곡을 지나며 바람은 흡사 노랫소리처럼 변해 인간들을 홀린다. 피폐해진 인간들은 그 소리에 정신을 잃고 사막 한가운데로 뛰쳐나가 샌드웜의 밥이 되곤 했다. 그게 웜베놈의 중독증상 중 하나라는 것이 알려진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도 저 바람소리에 동생 하나를 잃었다.
-노래를 못 부르겠어.
녀석은 눈물로 일그러진 눈을 하고 말했었다.
-엄마가 가르쳐 준 노래들만 생각나.
붕괴되는 오아시스에 가족들을 놔둔 채 도망왔다던 그는 바람소리가 들리는 달밤, 하필 모두가 잠든 밤, 맨발로 사막 한가운데로 걸어나가 행방불명되었다. 마치 그 자리에 없던 사람처럼 증발해버렸다.
라비는 그 날부터 저 바람소리가 그 동생의 허밍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흥얼거리곤 했던 그의 억눌린 노랫소리가 라비를 불러댔다. 으음음음음,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러 와. 모래무덤 속의 우리를 보러 와.
으음음음음,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으러 와. 네가 네 손으로 묻어버린 것들을 보러 와.
그윽, 그극, 극극.
듣그러운 소리를 내며 왼팔의 기계관절이 마찰한다. 이음새 사이사이 낀 모래를 털고 기름칠을 하는 일은 라비의 오랜 일과였다. 마지막 비가 오기 이전. 붉은 사구를 지나기 이전. 그 동생이 사막의 밤에 잡아먹히기도 전. 그의 곁에 한 손가락을 꽉 채워 꼽을 동행자들이 있었을 적, 그가 자리를 잡고 앉아 머신암을 손질할 때면 그들도 어느새 둘러앉아 별것 아닌 것들로 서로 시비따위나 걸어가며 시시덕대곤 했다. 왱알대는 모랫바람을 덮으며 불현듯 목소리들이 돋는다.
-저 형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나 몰라.
라비의 옆에 앉아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누군가가 혀를 찼다.
-밤에만 길을 잘 찾으면 뭘해, 낮엔 동서남북도 모르는데.
-어허, 조용히 해. 어디 하늘 같은 길잡이님께.
형이라 불린 사람이 짐짓 엄한척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는 코웃음만 쳤다.
-하! 그놈의 하늘 같은 길잡이님이라 서로 못 모셔가서 안달이니 살았지. 혼자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 봐라. 같은 곳만 빙빙 돌다가 지금쯤 말라 죽었을걸?
-맞는 말이라 반박은 못하겠지만 괘씸하니까 좀 맞아라.
모닥불 주위를 먼지 날리며 부산스레 뛰어다니는 둘에게 짜증이 난 레오가 어김없이 무어라 버럭 소리를 지르고, 동생은 저쪽 바위 위에 앉아 킬킬대고, 라비는 복닥대는 소리를 흘려들어가며 무심히 기계팔만 쓸고 닦았다. 무심결에 웃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극, 극, 그으윽.
한참을 먼지를 털어내고 기름칠을 한 후에야 삐걱대던 기계관절들이 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라비는 손질을 마친 머신암을 그나마 멀쩡한 천에다가 잘 싸서 배낭에 넣었다. 밤에 이런 걸 끌어안오 자면 쇳덩이에 체온을 뺏겨 저체온증으로 죽기 딱 좋다. 그것도 길잡이가 알려준 것이었다. 정작 그에게 기계팔을 만들어 준 사람은 그런 세심한 배려따윈 일언반구도 없는 놈이었다.
털썩 바닥에 드러누운 라비가 시선을 들었다. 쏟아질듯 빼곡한 은하수가 먹먹하게 시야를 덮는다. 저렇게 소란스러운데 옛날에는 흔적도 안보였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돌아온 별들. 선인류가 만든 재앙의 끝에서 지구의 하늘로 되돌아온 별들은 이 땅에 그들의 자식을 낳았다고 했다.
-넌 정말 어떻게 살려고 이러니?
걱정스런 눈을 하고 까맣게 어렸던 라비에게 그가 했던 말이었다. 별을 보고 오아시스를 헤아리는 사람, 별의 축복을 받은자, 몇 안되는 길잡이.
그는 피 한 방울 안섞인 라비를 동생처럼 팔 안으로 싸고 돌았다. 검은칼은 모두가 두려워하는 무자비한 학살자였으나 그 앞에서는 그저 모래언덕에서 주운 불쌍한 들개의 이름이 되었다. 고향을 떠나오던 날, 잘린 팔에서 피를 철철 흘린 채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던 라비를 그가 주웠을 때부터 그랬다.
-살고 싶다며. 그게 네 유일한 바람이라며.
안타까움이 쌓여 분노가 된 눈으로 그가 말했었다. 까맣고 동그란 눈. 그를 떠올리면 자꾸만 그 눈동자가 생각이 났다. 별을 보는 사람이라 그런지, 동그랗고 단단하게 뭉쳐 생기로 반짝이던 눈동자.
-목숨만 붙어있다고 살아가는게 아냐. 지금 네가 저 모래괴물과 다를 게 뭐가 있니.
-버러지가 아니라면 네 의지를 갖고 살아. 네가 뭘 원하는지를 생각해.
-분노라도 좋아. 마음껏 타올라도 돼. 그게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는 자비로운 주인처럼 라비의 목줄을 풀어주었다. 분노로 타오르는 라비의 눈을 보며 기뻐했다. 그 색이 어떻건 간에, 그가 주운 들개의 눈에 빛이 돌아온 것을 기꺼워했었다.
그를 잃은 것은 마지막 남은 오아시스로 향하는 길 위에서였다. 생각해보면 라비와 다른 이들이 사냥을 할 때 애완견처럼 그의 주위를 맴돌며 지키던 동생이 없으니 그가 목숨을 잃는 건 시간문제인 일이었다. 발치에서 솟은 샌드웜의 집게발에 스친 상처는 순식간에 연약한 길잡이의 숨을 앗아갔다.
그 떄부터 레오와 라비만이 남았었다. 하나 남은 동료는 원래도 말수가 적었지만 그의 죽음이 비통했던 것인지 울음 대신 말을 삼키는 때가 빈번해졌다. 죄책감의 그림자가 내내 그의 눈 아래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라비는 그를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는 누군가를 지킨 일이 없기에. 그게 아무리 그를 주워다 기른 자였어도. 그 사람조차 제 목숨을 그에게 짐 지운 일이 없었으니까.
생각해보니 빌어먹게도 그랬다. 곁에 머물렀다 떠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목숨구걸 하지 않았다. 살려달란 소리 한마디 한 적 없었다. 잊지말라 매달린 적도 없었다. 약한 고개 한번 기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제 자신이 지금 그들을 주렁주렁 끌고 다니고 있다. 이미 죽은 목숨들의 대가리를 꿰어 매단 채 질질 바닥에 끄셔가며, 저 미친 바람소리마저 안들리게 그들의 목소리로 귀를 틀어막고서.
그 날 밤을 그는 뜬 눈으로 지새웠다. 별들이 너무 소란스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
이튿날부터 또 비가 오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이것도 반복이라고 그나마 비에 익숙해졌다는 것이었다. 죽어야한다는 강박에 숨도 제대로 못쉬고 늘어져있던 날들에 비하면.
그런데. 빗속에서 바이크를 모는 내내, 라비는 무언가 목에 턱 걸린듯 꺼끌대는 것 같아 마른침만 연신 삼켰다. 마음 속에서 의문 하나가 가시처럼 뻐댔다.
이상했다. 비가 한번 오면 근 몇 년 간은 소식이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의 인생 통틀어 이런 일이 없었다.
그러나 라비는 그것을 이내 우연이라고 덮기로 했다. 이변이 일어나기엔 너무 오랜 길을 왔으니.
불현듯 신기루처럼 피어났던 이질감은 다시 환청이 시작되자 안개처럼 순식간에 흩어졌다. 이젠 죽어야 한다는 영혼의 충동질 대신, 비오는 날 죽어간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니 뜻대로 다 해먹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그를 주운 것은 길잡이였으나 그를 동료로 만든 것은 길잡이와 함께있던 몰이꾼, 레오였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던 사람. 그는 라비에게 베푸려는 마음이 없었으니 염려하는 대신 질책했다. 유일하게 소리 높여 그를 탓했다.
-짐 지우지 말라면서 왜 정작 짐짝취급을 해!
-책임? 지금 너한테 책임씩이나 지라고 하는 말인줄 알아? 그딴거 바라지도 않아!
-왜 옆에 있는 사람 개무시하고 너 혼자 죽으려고 발악하냐는 말이야!!!
말수 적은 몰이꾼은 말이 적은 만큼 한번 터지면 쉽사리 식지 않았다. 누군가 죽을 뻔하거나 심각하게 다치는 날엔 어김없이 화를 터트렸다. 대개는 독선으로 일을 키운 라비가 타겟이었다. 다른 이들이 한참을 말린 후에야 분이 안풀리는듯 씩씩대면서도 겨우 입을 닫곤 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죽은 날은 죽음처럼 침묵했다. 무엇보다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라비는 그때 그의 침묵을 지금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의 목숨을 매달고 달리는 지금에서야.
오전나절부터 시작된 비는 해가 다 져가도록 그칠 기미가 없었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결국 라비는 바이크를 지지대삼아 간이천막을 쳤다. 비어버린 수통이 금방 차는 것은 달가운 일이었지만 눅눅한 공기때문에 불이 붙지 않는 것은 번거로웠다.
근처를 기웃대는 모래도마뱀 몇마리를 잡아 불에 구워먹다가 라비는 문득 실소했다. 이제와서야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독에 절은 벌레다리를 휘두르며 피가 난무하는 사냥터에서 몇 번을 생사를 오가도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 그걸 일깨우고자 저를 닦달해댔던 사람들을 잃고 나서야 찾아와 주위를 어슬렁댄다.
-무슨 소용이냔 말이야.
유난히 회의적이었던 녀석의 목소리가 맞장구치듯 돋았다. 저보다 어렸으나 사막에서 십년을 더 굴러먹은 녀석. 어딘가의 오아시스에서, 한 탕 한 것으로 구해온 술에 그날따라 거나하게 취해서는 말했었다.
-죽어 뒈져버리면. 이렇게 땅 파먹는 버러지처럼 아등바등 해봤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 녀석이 제일 사는데 열심이었다. 모터나 엔진 달린 것이 심장 달린 것들보다 편하다던, 독장수. 샌드웜의 집게발에서 웜베놈을 추출할 줄 아는 기술자를 그리 불렀다. 그 독장수는 벌레 시체에서 독을 뽑고 다른 사냥꾼들에게서 약탈한 기계부품을 모아다가 팔아 식량을 사고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고 그들의 바이크를 개조하고 라비의 팔을 만들어주었다.
자이언트샌드웜의 집게발을 떼어다가 검을 만들어 준 것도 그였다. 그 흉물스러운 걸 쥐여주며 세상 뿌듯하게 웃던 얼굴이 선했다.
-이건 형밖에 못들어. 어디 한번 마음껏 날뛰어보라구.
그가 준 검은칼을 처음 들고 사냥하던 날에 그를 잃었다. 그가 설치한 폭탄은 몰려든 샌드웜들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놓지 못했고, 곧 날뛰는 집게발에 꿰뚫려 즉사했다.
훗날 자기가 만든 것의 이름으로 라비가 불리우게 된다는 걸 알게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아마 웃었겠지. 처음 칼을 주던 날처럼. 뿌듯하게.
라비는 거기에서 생각을 끊어냈다. 머릿속에서조차 언어를 몰아내었다.
비 맞은 머신암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음 한구석이 선득하도록. 그래서 그것을 떼어다가 눈 닿지 않는 곳에 처박아넣었다.
숨죽인 정적이 그를 찾아왔으나 그렇다고 잠은 오지 않았다.
+
새벽 사이 비는 그치고 여명이 파르라니 밝고 있었다. 비 그친 후의 아침은 엔진의 열기가 절실할만큼 추워서, 해가 완전히 밝기도 전 라비는 바이크에 시동을 걸었다.
여명을 등지고 얼마나 달렸을까. 눈 앞에 거대한 모래 산등성이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붉은 사구. 언젠가 몰이꾼이 말했던 그 곳은 막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여명 속에 서늘히 잠겨있었다.
그는 불현듯 바이크를 세웠다. 붉은 사구의 가장 높은 언덕 정상, 저 멀리 메마른 지평선이 내다보이는 곳에서 뒤를 돌았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 앞에 일순 숨쉬는 것을 잊었다.
밤새 내린 비는 모랫속에 자던 씨앗을 움틔웠다. 손가락 한마디만도 못자란 그것들은 막 내리쬐기 시작한 햇빛을 향해 이파리 하나라도 더 디밀고자 초록빛 고개를 뻗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망울져 틔운, 작고 노란 것들.
언덕을 뒤덮어 저 멀리까지 온통 황금빛의 꽃밭이었다. 땅 위에 피어난 별처럼 광경은 눈이 부셨다.
숨이 턱 막혔다.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라 라비가 턱을 아프도록 당겨 이를 사리물었다.
피투성이로 죽어간 그의 동료가 곁에서 속삭였다.
-신의 정원이 보여.
-나는 그걸 본 후로 기적을 믿지 않아.
그는 이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목도한 이 찬란한 것 이외의 것을, 감히 기적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
연료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벌건 불이 들어온 계기판을 보며 라비는 남은 길을 가늠해보았다. 길잡이가 짚어준 곳은 아직 하루는 더 족히 남았다.
이런 때 샌드웜이라도 보이면 잡아다가 웜베놈으로라도 연료를 보충할텐데, 하는 생각이 든 순간 머지 않은 날 느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이질감이 다시 목울대에 턱 걸렸다. 뭔가 이상했다.
모래폭풍에 휩쓸린 다음부터 샌드웜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늘 하루가 멀다하고 하다 못해 뱀처럼 가느다란 것이라도 득실거리는 것이 일상이었는데말이다.
이질감이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최후의 오아시스에서 세웠던 가설이 나타나 머릿속에서 신나게 주절댔다. 웜베놈이 샌드웜을 이끄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벌레들은 그것의 냄새에 광분하여 달려드는 것일 수도 있다는 추측들.
라비는 그에 혼자 납득했다. 어쩌면 정말 그것일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지금 검은칼이 없었으니.
폭풍에 휘말릴 때에 바이크에 꽂아 다니던 것을 잃어버렸다. 그 강력한 웜베놈의 집결체를 잃어버렸으니 놈들이 냄새를 못맡는 것이라면 말이 된다. 정말로 검이 벌레를 끌고 다녔다면 말이다.
ㅡ검이 벌레를 끌고 다녔다면.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진실이 머리를 거세게 후려치고 지나갔다. 모든 연결고리가 이 순간만을 벼른 톱니바퀴처럼 무서운 속도로 단번에 맞물려 돌아간다. 멍한 머릿속으로 그가 중얼댔다. 이것이었나. 내내 그를 채근해대던 이질감의 정체가.
검은칼. 그 칼은 그의 고향을 앗아간 자이언트샌드웜의 집게발로 만든 것이었다. 머신암을 단 채 그 괴물과 다시 마주한 전투에서 원수를 갚은 그는 복수의 징표를 원했고 바라 마지않던 형태로 얻었다.
그것을 살겠다는 생生에의 의지표명이라도 되는 양 깃발처럼 들고 온 오아시스를 누볐다. 그리고 그가 지나는 오아시스는 어김없이 샌드웜에게 파헤쳐졌다. 그는 그가 사냥한다고 여겼으나, 아니었다. 처음부터 쫓기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 동료들을 죽였다.
제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콰가가가각.
바이크가 흙바닥 위를 미끄러지며 급정거한다. 붉게 번지는 흙먼지 속에서 마른기침이 각혈처럼 터져나왔다. 질책하듯 내리쬐는 한낮의 태양빛 아래 그는 목이 다 긁히도록 쿨럭거렸다. 토해야할 것을 토하지 못했는데, 그게 가슴에 걸려서 나오질 않았다. 심장에 박혀서 빠지지를 않았다.
누군가를 위해 슬퍼했던 것이 너무도 요원했다. 어찌 탄식하는지도 잊어버렸을만큼. 그래서 그는 슬퍼하는 대신 눈 앞이 벌개지도록 분노했다.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사아아아악.
그 때, '그 소리'가 들렸다.
라비는 충혈된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고개를 들었다. 거짓말처럼 기침이 멎었다. 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들개처럼, 오감이 등골을 타고 미끄러지며 정신을 깨웠다.
사사사사사.
수많은 가느다란 발이 모래 아래를 파헤치는 소리. 손톱을 세워 모래 위를 간지럽히는듯 자그마한 마찰음. 샌드웜의 기척이었다.
사냥꾼의 눈이 차게 굳는다. 얼어붙은 용암같은 눈을 하고 그가 머신암의 기어를 전투모드로 전환했다.
철걱, 차르륵.
그가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것과 동시에 사람 피부처럼 반질했던 팔뚝 표면이 뱀의 비늘처럼 갈라져 뾰족히 갈퀴를 곤두세운다. 폭발적인 완력을 끌어낼 수 있도록 뼈 대신 자리한 굵은 메탈스프링이 최대치로 늘어나며 피스톤을 한계까지 압박했다. 손등의 뼈를 따라 갈고리모양의 가시가 돋고 손 끝에서 날카롭게 갈아넣은 샌드웜의 이빨이 첨단을 드러낸다. 이 손에 잡히면 웬만한 크기의 성체 샌드웜은 몸통 째로 으스러진다.
그는 습관처럼 바이크에서 칼을 뽑아들려다가 멈칫하곤 가슴팍의 건홀더에서 권총 하나를 꺼내 잠금쇠를 풀었다. 수류탄 갯수를 점검하는 동시에 그의 귀는 버러지의 수를 가늠했다. 최소 다섯. ....열...... 아니, 그보다 많다.
낭패감이 짙은 눈으로 그가 모래바닥을 훑었다. 지금 상황으로는 그 혼자 열이 넘어가는 수의 샌드웜을 상대할 수 없었다. 칼이라도 있었다면 순식간이겠지만, 하고 생각한 순간 저 너머의 모래먼지 끝자락에 거뭇한 것이 시야에 돋았다.
검은 칼.
그것은 붉은 바위사이에 귀환의 깃발처럼 꽂혀있었다. 마치 그를 여기서 기다렸다는 듯이, 당연하게 그를 맞았다.
라비가 실소했다. 이 쯤되면 운명의 전언이라 해도 무방했다. 뒷꽁무니에 버러지를 끌고 다니며 쫓기다 죽이고 죽이다 쫓기라는, 그게 네 운명이라는 끔찍한 계시.
사아아악.
일순 바람이 멎었다. 라비는 그와 동시에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 직전의 정적이 깔리는 찰나, 엑셀이 사정없이 밟혔다. 엔진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가는 것을 신호로 모래바닥 아래에서 길다란 것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바이크에 몸을 바짝 내려붙여 달리며 라비는 머신암을 몸 옆으로 늘어트렸다. 머리 위로 벌레의 집게발이 섬뜩한 파공성을 내며 스쳐지나간다. 바이크를 향해 부딪히려 돌진하는 벌레의 몸통을 향해 머신암에 들린 권총이 불을 뿜는다.
탕! 탕!
달리는 바이크의 양옆으로 총탄에 직격당한 벌레의 시체가 추락한다. 거의 다 왔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눈을 좁힌 라비가 바이크에서 상체를 일으키며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터엉!
그 순간 바이크가 허공으로 튕겨져올랐다. 바이크를 집어던진 땅 아래에서 거대한 생명체의 등뼈같은 것이 무덤에서 일어나듯 몸을 드러냈다. 자이언트샌드웜이었다.
라비는 바이크가 튀어오르는 순간 안장을 박차고 도약했다. 이윽고 까마득한 허공에서부터 모래 위로 무게가 없는듯 내려앉은 그의 머신암에는, 검은 칼이 단단히 들려있었다.
그워워워워...
자이언트샌드웜이 몸을 뒤틀었다. 칼에 반응하고 있다. 감정도 없는 쓰레기괴물 주제에 원한이라도 생긴듯 구니 얼척이 없다. 각성제 캡슐을 질겅질겅 씹던 라비가 실소하며 칼을 비껴들고 걸음을 옮겼다. 오른손에는 어느새 이 무시무시한 무기를 다룰 때 사용하던 메탈글로브가 채워져 있다. 오래는 아니지만 금속장갑은 맨손보다는 검은 칼의 독기를 잘 버틴다.
탓 탓 탓 탓 탓, 점점 속도를 붙여가다가 칼을 땅에 박아넣고 쏘아지듯 몸을 날린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햇빛 아래, 태양빛도 죄 빨아들이는 칼이 유일하게 검은 선으로 그의 잔상을 남긴다.
카가각.
도약 한번에 자이언트 샌드웜의 몸통 위로 올라타 칼을 꽂았다. 지구의 폐기물들로 버무려져 굳어진 등갑이 생살을 뜯는것같은 섬짓한 소리를 내며 벌어진다. 그 사이로 라비가 주먹 반만한 크기의 무언가를 던져넣고 앞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달리는 기차 위를 질주하듯 거대한 벌레의 몸통을 타고 거슬러 오른다.
퍼벅!
크지 않은 폭발음이었으나 위력은 대단했다. 라비가 괴물의 속에 박아넣은 폭탄은 확실히 그것의 속부터 조져놓았다. 자이언트샌드웜의 몸통 한가운데가 튀겨지듯 터지며 길다란 것이 단번에 반동강이 난다.
여전히 사납게 날뛰는 괴물의 위에서 라비가 소형폭탄 몇개를 꺼내 허공에 던지고, 칼 옆면으로 그것을 차례로 후려쳤다.
쿠구구궁! 콰쾅!
그를 향해 달려들던 샌드웜들이 폭발에 말려들어 산산조각난다. 그 와중 악착같이 기어올라 그의 발목을 향해 집게발을 들이대는 것의 몸통을 향해 그가 칼을 쑤셔박았다. 그 바람에 등허리가 꿰뚫린 자이언트샌드웜이 몸을 사납게 뒤틀었다.
각성제의 기운으로 푸른 빛이 도는 사냥꾼의 동공이 기민하게 좁혀진다. 말단까지 곤두선 동체시력이 반응하기도 전에 이미 몸은 움직이고 있다.
수없이 익어버린 상황, 수백번의 사냥으로 다져진 루틴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독장수가 최대화력으로 샌드웜이 달려드는 주변을 엄호하고, 몰이꾼이 집게발에 사슬을 감아 움직이는 반경을 봉쇄하는 타이밍. 하지만 그 혼자 해치워야하니 최대한 빠른 시간안에 승부를 보는 수밖엔 없었다.
퍼벅! 퍽! 퍼벅!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발 디뎠던 벌레의 몸통이 폭죽처럼 터진다. 폭발의 잔해 속으로 샌드웜 무리가 몰려올 때, 그가 칼을 공중으로 던져올렸다. 까맣고 길다란 것이 부메랑처럼 하늘로 비상했다. 그와 동시에 오른팔로 수류탄을 던지고, 그것을 향해 자유로워진 머신암의 검지를 조준한다.
기계팔이 절걱대며 장전음이 나기 무섭게 말아쥔 소지 끝의 버튼으로 달칵, 트리거가 당겨지고 손가락 끝에서 작은 쇠구슬이 발사된다. 매서운 기세로 쏘아진 그것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던 폭탄을 정확히 명중시켰다.
콰과과광!
모래산이 뒤집힐정도의 폭발과 함께 우글거리던 샌드웜무리가 초토화된다. 그리고 숨 돌릴 틈 없이 흙먼지 사이를 헤쳐 달리던 라비가 발을 크게 굴러 하늘로 뛰어올랐다.
쐐애액!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팽글팽글 돌며 낙하하던 칼이 그의 손 안으로 자석처럼 와서 잡힌다. 검은칼과 한 몸처럼 붙은 라비는 공중에서 몸을 한바퀴 돌러 그대로 거대한 모래괴물의 대가리 정중앙를 조준하고 추락했다. 체중에 추락가속도가 더해진 힘을 실은 칼이 작살처럼 쇄도한다.
그어어어어억.
칼은 정확히 집게발 정중앙으로 깊숙히 박혔다. 머리를 꿰뚫린 괴물이 굉음을 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이 벌레는 발성기관도 없는 주제에 거대한 몸집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꽤나 소리를 그럴싸하게 낸다. 지금처럼 귀가 멀어버릴 것같은 소리를 내면 그게 거의 다 왔다는 신호였다. 라비는 머신암에 체중을 실어 벌레에 꽂힌 칼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극, 그극,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폭탄도 못뚫는다던 겉갑이 양단된다. 그와 동시에 집채만한 괴물은 움직임을 잃고 널브러졌다.
사냥이 끝났다.
즈아아아악.
겉갑이 부서진 머리가 쪼개지며 그 안에 있던 독샘이 유전처럼 터졌다. 그 안에 잠긴 검은칼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웜베놈을 탐욕스레 삼킨다. 웜베놈을 머금을수록 이 칼은 더 가볍고 단단해져 서느란 예기를 뿜는다. 반경 오백미터의 생명체를 단숨에 즉사시킬 독기를 제 안에 응축시켜 보석처럼 저를 갈무리하는 것이다.
포식하는 칼을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라비가 그것을 뽑아들고 독이 퍼지지 않은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러나 발을 디디기 무섭게 바닥 아래서 솟은 샌드웜이 다리를 감았다. 집게발이 박히기 직전 간발의 차로 뜯어낸 그가 눈을 좁히고 주위를 살폈다. 무리의 우두머리를 죽였는데도 샌드웜의 무리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질감. 멀미처럼 다시 치밀어오르는 그것을 악문 어금니 새로 자근자근 씹어 삼켰다. 자이언트샌드웜의 무리들은 원래 왕을 잃으면 줄 끊어진 인형처럼 삽시간에 제각기 뿔뿔히 흩어지기 마련이었다. 저것들이 아직 여기 버티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다른 우두머리가 또 있는 것.
등골을 타고 공포감이 치솟았다. 섬짓하게 울리는 본능의 경고에 라비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자이언트샌드웜의 거대한 몸통이 이미 그를 향해 휘둘러져오고 있었다.
퍽!
모든것이 갑자기 더디어졌다. 그의 영혼이 온 힘을 다해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것처럼. 괴물의 몸통에 직격당해 까마득히 공중으로 튕겨져나는 모든 과정이 선연하게 느렸다.
벌레를 죽이며 날뛰는 내내 숨죽여 바라보듯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입을 열어 웅얼거리는 소리가 이명처럼 울린다. 목소리 하나에 한 개의 목숨, 그만큼의 기억들이 눈앞에서 페이지를 넘긴다. 그의 생애 모든 나날들이 스쳐지나간다.
한참 그것을 바라보다가 그가 가물해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놓기가 싫었다. 그가 소중히 여겼으나 소중히 여기지 못했던 것들을.
감은 눈꺼풀 새로 눈물 한방울이 흘러내렸다. 사막에 내리던 비처럼, 참고 참던 오열처럼.
그 때 허공에서 빛이 번졌다.
라비가 목에 지니고 있던 팬던트에서부터 시작된 빛은 처음에는 붉은 사구에 핀 꽃처럼 작았으나, 점차로 커져 태양만큼 환하게 작열했다.
그리고 맹렬히 추락한 그의 몸이 바닥에 닿기 직전, 그를 삼키고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
눈을 다시 떴을 때는 거친 돌바닥 위였다.
바닥에서 스미는 냉기에 소스라쳐 그가 몸을 일으키다가 신음했다. 피가 번지는 옆구리와 갈비뼈가 부러진건지 호흡마다 뻐근한 가슴팍을 더듬다가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꼼짝없이 죽어야 할 상황이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라비가 주변을 훑다가 머리 위를 올려다보고 경악으로 숨을 들이켰다.
모래색의 바위로 된 까마득한 천장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곳은 바위 속을 통째로 파내 조각한 건물의 안 같았다. 오아시스 어디에도 본 적 없는 양식이었다. 모래색의 암석은 웅장하고 매끄러운 기둥과 화려한 부조로 깎여 태양빛 들지 않는 동굴같은 바위속에서 따스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장엄하게 나열된 기둥을 넋놓고 바라보던 라비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빛이 들어오고 있다. 이곳 어디엔가 밖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는 말이었다.
일단 이 곳을 나가야 한다. 허벅지를 얕게 꿰뚫은 샌드웜의 파편 하나를 뽑아낸 그가 절뚝이는 걸음으로 빛의 진원지를 찾아 두리번 대고 있을 때였다.
우우웅.
그의 가슴팍에서 무언가 진동했다. 몸에서 떼어놓을 때가 없어 존재를 잊곤 했던 둥근 고리모양의 팬던트. 그의 일족의 보물이자 어머니의 유품인 그것이 희미하게 빛나며 울고 있었다. 마치 방향을 일러주듯 간절하게.
팬던트가 이끄는 곳, 장엄한 신전 너머 빛이 비춰오는 방향을 향해 그가 홀린듯 걸음을 옮겼다. 그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우우웅, 하고 팬던트가 기쁜듯 진동했다.
처음에 비온 후 모래산에서 피어난 들꽃같이 작던 빛은 가까이 갈수록 점차 태양처럼 찬연해졌다. 그러나 라비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갈증난 사람처럼 빛을 들이마셨다. 비어있는 지도 모른채 닫아두었던 영혼의 허공을 그 빛이 찰랑찰랑 채워주는 것 같았다. 황홀한 해소였다.
그렇게 거대해지던 빛은 그 근원지에 가까이 다다르자 점차로 줄어들더니, 그의 손 안으로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이윽고 손 안에 놓인 것은 방금 전의 찬란함을 단단히 굳혀 만든듯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코인이었다.
그리고 코인과 목에 걸린 팬던트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하나의 목소리를 가진 한 몸이라고 주장하듯 완벽히 같은 주파수의 진동으로 그것들은 서로를 불렀다.
코인을 손에 집어든 라비가 홀린듯 그것을 팬던트 안으로 맞춰넣었다. 그것은 완벽하게 맞아들었다. 원래 있던 자리를 되찾은 것처럼.
그리고 운명의 수레바퀴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잘각, 잘각.
두개의 조각이 맞춰짐과 동시에 본디 한 몸이었던 것들은 제 일부에 반응해 본래 모습을 찾았다. 코인에서 빠져나온 이음쇠가 팬던트의 안쪽에 자그맣게 패여있던 홈으로 안착한다. 이윽고 팬던트 안쪽에서 작은 고리 하나가 분리되어 겉의 고리와 직각을 이루며 고정되고, 팬던트의 이음쇠를 회전축 삼아 동그란 코인이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한 모습으로 라비의 손을 떠나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 오너먼트는 다시금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작은 태양처럼 빛나는 그것을 보고 라비가 탄식했다. 그가 이 곳까지 가져온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황금향으로 가는 문을 여는 열쇠. 일족의 전설은 실재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저것이 그를 여기까지 이끈 것일지도 몰랐다. 온전한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그때였다.
작은 행성처럼 빛나는 열쇠를 넋을 잃고 보던 그에게, '그것'이 고했다.
[선택하라.]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에 그는 당황했다. 선택하라고? 이것은 단지 문을 여는 것, 통행증이 아니었던가. 그가 전해들은 이 전설에 선택지는 등장한 적 없었다. 그 곳으로 가라고만 했을 뿐.
그가 유일하게 목숨처럼 지고 살았던 사명에 그의 의지는 없었다. 그저 도달하는 것, 그 뿐이었다.
대답 않는 그에게 다시 한번 그것이 독촉했다.
[선택하라.]
무엇을? 반발심처럼 솟은 의문에 그의 피가 음성 대신 답했다. -열고자 하는 문을.
스스로 깨달은 답에 일순 멍해졌던 그는 곧 조급히 되물었다. 그렇다면. 어디로든? 낙원이 아닌 곳이라도? 내가 가고자 하는 어디라도?
이미 지나온 곳으로도?
....이미 지나온 시간으로도?
손 안에서 빛나는 타임터너는 부정하지 않았다. 거대한 전율이 그를 휩쓸고 지나갔다. 곧이어 깨달음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그 거센 물결에 휩쓸려 휘청이며 그는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게 황금이 가득한 낙원따위는 의미 없었다.
그를 처음으로 친구로 대해준 이를 잃은 곳,
소중한 것의 의미를 가르쳐주려 애썼던 이를 잃은 곳,
죽어가는 그를 살려 품은 이를 잃은 곳,
그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켜준 이를 잃은 곳,
-살아남거라. 널 목숨보다 사랑한단다.
그를 사랑한 어머니를 잃은 곳.
모든 잃은 것들이 묻혀있는 그 오아시스가,
모든게 말라 죽어가는 이 사막이 그가 돌아올 유일한 곳이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답이 정해졌다. 그는 기나긴 세월 끝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구멍을 틀어막고 바위처럼 뭉쳐버린 울음을 겨우 목안으로 삼키고, 메마른 입술을 축여 벌렸다.
그리고 그가 열고자 하는 문을 택했다.
선택의 기로 앞에 타임터너가 눈부시게 작열했다. 떠오른 작은 태양을 바라보며 라비가 노란 꽃처럼 미소지었다. 희망과도 닮은 빛깔이었다.
그는 돌아올 것이다.
몇 번을 헤맨다 해도,
"이 곳으로."
다시 그의 오아시스로.
-Oasis, Fin.